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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는 왜 위대한 역사서인가? ㅣ 지식메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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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는 왜 위대한 역사서인가? ㅣ 지식메일

傳播者 2022. 10. 26.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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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는 왜 위대한 역사서인가? ㅣ 지식메일

사진설명 : 병마용갱

 

의지의 산물, 『사기(史記)』
사마천은 궁형을 당했다. 이릉(李陵)이 흉노족에게 항복한 사건을 변호하다 한(漢) 무제의 미움을 산 것이다. 사마천은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죽음을 피하려 치욕스러운 궁형을 택했다. 『사기(史記)』의 완성! 이는 사마천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견딘 이유였다.

B.C. 99년, 사마천의 나이 마흔 아홉이었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 명예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유교 문화에서는 죽음을 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선택이 아니었을까? 꼭 살아서 『사기(史記)』를 완성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사마천, 역사를 만들다.
사마천에게는 단순히 『사기(史記)』를 '완성'해야 한다는 이유 외에도 자신이 저술한 내용을 수정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다. 이전까지는 한나라의 역사와 황제를 찬양하는 내용 위주였던 『사기(史記)』의 논조를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감옥에 갇혀 고통을 당한 사마천은 세상사에 대한 다양한 고찰을 하게 된다. 이는 『사기(史記)』의 내용을 바꿔야 한다는 결론을 낳았고, 사마천이 살아야 할 이유가 되었다. 그는 사형 대신 궁형을 택했다. 이후 사기의 논조는 바뀐다. 사마천은 역사적 인물들로부터 황제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할 줄 아는 역사가가 된 것이다. 이를 두고 중국의 사상가 양계초는 말했다.

"사마천 이전에 역사는 없었다.", "사마천은 역사의 조물주"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역사서 집필에 반영한 사마천. 그의 의지가 담긴 책 『사기(史記)』. 이 책이 다른 책과 격을 달리 하는 이유이다. 역사서는 『사기(史記)』 전과 후로 나뉜다. (동영상 3:16-5:16)

시대를 통찰하는 힘
『사기(史記)』 에는 시대를 통찰하는 힘이 있다. 이 책은 170여개의 제후국들이 춘추전국시대 550년을 거치면서 진(秦)이라는 하나의 나라가 되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중국인의 역사적 DNA를 구성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현실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경우의 사건들에 도움이 될만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사기(史記)』의 등장 인물 역시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4000여명의 사람들을 언급하였다. 이 중 제후가 200여명, 왕이 90여명 정도 된다. 200여명의 제후 중 120명은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였다. 제후도 결국은 사람이고, 약자가 평생 약자로 살지만은 않는다는 역사적 사실. 사마천은 『사기(史記)』를 통해 이를 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등장 인물들 뿐만 아니라 직업도 다양하다. 『사기(史記)』에는 정치가를 제외하고도 130여 개의 직업이 등장한다. 다양한 삶의 궤적을 담으려는 사마천의 노력이 고스란히 들어간 것이다. 실로 '인생백과사전' 이라 할만한 사마천의 『사기(史記)』. 그 안에는 시대를 통찰하는 힘이 들어있다.


『사기(史記)』 , 논란의 중심에 서다.
사기는 특유의 문학적 필체 때문에 역사적 진위 논란이 많았다. 실제로 『사기』의 12본기(本紀) 중 앞의 3개의 본기-오제본기, 하본기, 은본기-는 약 100년 전까지 허구로 여겨져 학문적 연구가 미흡했다. 하지만 『사기(史記)』의 역사적 진위 여부에 힘을 실어준 두 가지 사건이 생기면서 논란은 점차 줄어들었다.

거북이 등에 새겨진 역사
갑골문(甲骨文)
중국 은나라 때 점복의 내용을 거북 껍질과 짐승 뼈에 새긴 문자. 현재까지 알려진 한자의 가장 오래된 형태이다.

1899년 왕희영이라는 약사는 중국 하남성 안양현에서 뼈에 새겨진 글자인 갑골문(甲骨文)을 발견했다. 하남성 안양현은 고대 상나라의 수도 은허(殷墟) 지역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이곳에서 발견된 갑골문의 기록이 『사기(史記)』에 등장하는 왕들의 이름과 일치한 것이다. 머나먼 역사 속 이야기이자 허구로만 여겨지던 것들이 거북이 등껍질을 통해 빛을 보았다.


'강과 바다는 수은을 흘려 보냈다'
병마용갱
진시황릉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지하 갱도로, 진시황의 무덤을 수호하려는 목적에서 제약된 6000개 이상의 병마용이 매장되어 있다.

『사기(史記)』의 역사적 신빙성 여부에 더욱 큰 힘을 실어준 것은 진시황릉의 발굴이었다. 애초부터 사기에 기록된 진시황제의 무덤에 관한 내용은 대부분 허구로 여겨졌었다. 하지만 진시황릉의 발굴은 『사기(史記)』의 사료로서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에 진시황의 시체를 안치하면서 천장에는 천문도를, 바닦에는 지형도를 그렸다고 적었다. 이 떄 강과 바다에 해당하는 부분에 수은을 흘려보냈다는 언급이 있는데, 발굴 당시 진시황릉의 봉분에 함유된 수은량을 측정해 본 결과 사기의 기록과 같이 수은을 매장에 사용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는 결과가 나왔다. 『사기(史記)』의 기록이 허구가 아니라는 점이 역사적 고증으로 증명된 것이다. 이로써 사기의 역사적 진위 논란은 점차 줄어들었다. 진시황릉의 죽은 황제와 병사들은 『사기(史記)』를 살려내었다.

(동영상17:33-20:45)
죽음보다 치욕적인 궁형을 견디면서 완성한 역사서 『사기(史記)』. 사마천은 이 책을 통해서 물질적 실리의 추구, 당대의 왕 비판 등 당시의 지식인으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사상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가 언급하고 다룬 수 많은 사람들과 직업군을 통해 우리에게 살아있는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청년 시절 전국을 돌아다니며 유적지를 직접 답사하고 역사서 완성이라는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사마천, 그리고 그의 역사책 『사기(史記)』. 사마천은 역사의 조물주라는 양계초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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