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읽고 쓰는 재미, 즐겁게 느껴 봐, 깨닫는 앎, 재미 쏠쏠해!

임어당( 林語堂) 본문

人物---不世出

임어당( 林語堂)

傳播者 2024. 11. 5. 07:54
반응형

임어당( 林語堂)

임어당( 林語堂)

 

네이버 캐스트에서 퍼왔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나로부터 나오겠지만 서양 철학이나 과학쪽에서 대안 마련을 위한 팁을 얻긴 어려울 것 같다. 그 경우 내가 취할 수 있는 대안의 경우의 수는

나 혼자 알아서와 선배들의 발자취에 그래도 미련을 가지려고 나뉠 수 있으며, 후자는 그래도 서양 철학과 이제는 동양 철학도로 또 나눠질 수 있다.

아, 근데 오늘 내 사고의 특성은 새록새록 아이디어가 잘도 떠오르는데 찰나만 묵혀 둬도 그냥 증발해 버린다는 것이다. 위처럼 그렇게 평범한 이야기를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오늘 벌써 두 번 째다.

 

1968.6.18 서울에서 열린 제2회 세계대학총장회의 참석하다

지금까지 우리말 번역판 수십 종이 나왔던 <생활의 발견>으로 유명한 린위탕. 그는 소설가, 중국 고전 번역가, 산문가, 문예비평가, 언어학자, 문명비평가였다. ‘생활과 사상의 소박함이야말로 문명과 문화의 숭고하고도 건전한 이상’이라 말했던 그는, 중국 문화를 서양에 널리 알린 사람이면서도 당대 중국의 현실에는 눈감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비틀즈풍은 부잣집 자식들이 복에 겨워 누리는 폐풍'

“동양은 직관적인 통찰로 현실에 대한 전체적인 반응을 보이고, 서양은 분석적, 이론적 추리로 반응을 보인다. 동양은 그 철학에서 진실로 감정이 중요한 구실을 하지만, 서양에는 그런 철학이 거의 없다. 그리하여 동양에서는 서양처럼 군사, 정치 등 어떤 여건에서도 좀처럼 통계로 설명하지 않는다. 중국의 도(道)는 서양의 진리 개념처럼 추상적, 이론적인 것이 아니고 실제적인 가치가 되어 인생과 관계되는 진리다. 오늘날에는 동양사상의 비중이 점점 더 커져가고 있다.”

 

인생의 여유와 운치가 물씬 묻어나는 특유의 산문만큼이나 맑은 외모를 지닌 링위탕

1968년 6월 18~20일 서울 경희대학교와 워커힐에서 31개국 154명의 대학 총장 및 학자들이 참석한 제2회 세계대학총장회의가 열렸다. 한국에서 열린 사실상 최초의 대규모 국제학술대회였기 때문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개막축사를 하는 등 큰 관심을 모았다.

 

린위탕은 대학 총장은 아니었지만 세계적인 석학으로서 참석했다. 그는 6월 19일 서울시민회관 강연에서(‘전 인류 공동 유산의 추세’) 위와 같이 말했다. 흥미로운 것은 대한뉴스 681호가 전하는 린위탕의 다음과 같은 강연 내용.

 

“비틀즈풍은 부잣집 자식들이 복에 겨워 누리는 폐풍에 불과한 것이며, 건설도상 국가의 젊은이들이 흉내 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시 비틀즈가 전 세계적으로 젊은이들 사이에 얼마나 큰 선풍을 일으키고 있었는지 짐작케 해준다(대한뉴스가 린위탕의 진의를 제대로 옮겼는지 여부를 일단 접어두고 보면). 또한 린위탕이 지녔던 일종의 문화보수주의적 태도, 전통적 가치를 중시하는 태도를 엿보게 해준다. 그는 1970년 6월 서울에서 열린 제37차 국제펜클럽대회에도 참석해 ‘동서문화의 유머’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목사 아버지의 영향으로 기독교학교를 다니며 서양학문을 익히다

린위탕은 복건성 평화(平和)현 남부 판자(坂仔)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허러(和樂)였고 중학교 때 위린(玉霖), 대학 입학 후에는 위탕(玉堂), 1925년 이후 위탕(語堂)이라는 이름을 썼다. 아버지는 상인 출신의 목사였다. 소학교부터 기독교학교를 다니며 서양문화의 세례를 받았고, 자신의 집에 기거한 미국인 전도사의 영향을 받아 12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영어를 공부했다. 1912년 17살 때 상하이 세인트존스대학에 입학하여(1916년 졸업) 광범위한 독서에 탐닉했고, 칭화학교(칭화대학의 전신)에서 영어교사로 일하며 비로소 중국 전통 문화와 고전 지식을 집중적으로 쌓았다.

 

고향 마을 처녀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녀가 실명한 조부를 돌보느라 고향을 떠날 수 없어 이별해야 했다. 대학 시절에도 여대생을 사랑했지만 린위탕의 집안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여성 쪽 부모가 반대하여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 부모의 권유로, 상하이 세인트메리학교를 졸업한 랴오추이펑과 1919년 유학을 떠나기 직전 결혼했다. 훗날 어느 서양인이 자유연애가 아니라 부모가 골라준 신부와 결혼하는 것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당신은 부모를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에 부모님을 사랑하고 효도하나요?”

 

칭화학교에서 유학 보조금을 받아 하버드대학에서 비교문학 석사학위를 받았지만 보조금이 끊어져 곤란을 겪다가 프랑스로 건너가 중국인 노동자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독일 예나대학에서 한 학기를 마친 뒤 라이프리치대학으로 옮겨 1923년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베이징대에서 비평과 언어학을 가르쳤고, 1925년에는 베이징사범대학 강사, 베이징여자사범대학 교수 및 교무처장이 됐다. 이 시절에 대한 회고다. “나도 학생들의 시위운동에 동참하여 깃대와 벽돌을 들고 경찰들과 싸웠다. 경찰은 부랑아들을 고용하여 학생들에게 돌을 던지게 하여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을 막았다. 그때 나는 내 야구 솜씨를 발휘할 기회를 많이 가졌다.”

 

30년 넘게 미국에서 살았지만 미국 국적 취득하지 않아

1926년에 복건성 하문(厦門)대학 문과 주임교수로 옮겼지만 이듬해 1927년 3월 우한(武漢) 정부 외교부장 천유런(陳友仁)의 비서로 초빙 받아 한 때나마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같은 해 9월 우한정부가 소멸한 이후 상하이로 옮겨 문필가 생활로 일관했다. 귀국 후 1920년대 말까지 그는 루쉰이 주도하여 1924년 창간된 주간지 <어사>(語絲)를 무대로 활동했다. 그 시절에 대한 회고다. “배워서 여유가 생기면 벼슬이나 하려는 생각을 갖고 글을 쓰는 이들이 싫었다. 우리는 매 개인이 모두 자신의 진심에서 우러나는 말을 해야지 남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런 스타일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리는 <어사>를 우리 마음에서 솟아나는 소리와 말이 자유롭게 뛰어 놀 수 있는 공원으로 여겼다.”

 

1920년대 린위탕은 언어학자이자 문예평론가로서의 면모가 강했지만, 30년대 이후부터는 산문가, 번역가로서 중국 문화를 서양에 소개하는 일에 주력했다. 1936년 8월 린위탕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을 무대로 전업 문필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미국 이주에는 작가 펄 벅의 권유가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린위탕은 이미 1935년에 미국에서 출간한 <내 나라 내 국민>으로 미국 독자들의 인기를 모으고 있었고, 1937년에 내놓은 <생활의 예술>(영어 원제는 The Importance of Living. 우리나라에서는 <생활의 발견>)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국내에서도 한 두 해에 걸쳐 벅역판이 새롭게 출간되는 <생활의 발견>.

94년 일신서적,95년 범우사,99년 문예출판사,06년 혜원 출간(왼쪽부터)

미국에서 린위탕은 일본 제국주의를 규탄하는 글을 자주 기고했고 1940년과 1943년에 잠깐 귀국해 강연했지만, 중국 문예계에서의 영향력은 크지 못했다. 그는 <경화연운>(1939), <풍성학려>(1941), <당인가>(1948), <주문>(1953) 외의 많은 소설과 <소동파전>(1947), <노자의 지혜>(1948), <장자>(1957), <측천무후>(1957) 등 중국 문학, 사상, 고전 관련 책도 발표했다. 그가 낸 책은 중문, 영문을 합쳐 50여 권에 달한다.

 

1954년에는 싱가포르에 화교들이 세운 난양(南洋)대학 교장(총장)으로 추대되었지만 학교 측과의 마찰로 반 년 만에 그만 두었다. 1967년 홍콩 종원(中文)대학 연구교수로 초빙되어 <당대한영사전> 편찬 책임을 맡아 1972년에 출간했고, 1975년 <경화연운>으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린위탕은 30년 넘게 미국에서 살았지만 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고 집도 사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미국 국적을 취득하라 권했지만, 이곳은 내가 뿌리를 내릴 곳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 집을 사지 않고 월세를 내며 살았다고 말해주었다.”

 

"중국은 정적인 문화고 서양은 동적인 문화다."

『중국은 실천을 중시하고 서양은 추리를 중시한다. 중국은 정을 중시하고 서양인은 논리를 중시한다. 중국철학은 천명을 따라 마음의 평안을 얻는 임명안심(立命安心)을 중시하며, 서양인은 객관적인 이해와 해부를 중시한다. 서양은 분석을 중요하게 여기며 중국은 직감을 중요하게 여긴다. 서양인은 지식추구에 중점을 두고 객관적 진리를 추구한다. 중국인은 도의 추구를 중시하여 행동의 도를 추구한다.』(<동서 사상의 차이> 중에서)

 

『중화 민족을 서양 국가와 비교해보면 진취성이 모자라고 보수적이며, 용감하고 의연한 정신이 모자란다. 반면 인내심이 매우 깊다. (…) 중국 문화는 정적인 문화고, 서양 문화는 동적인 문화다. 중국은 음(陰) 위주이고 서양은 양(陽) 위주다. 중국은 정(靜) 위주고 서양은 동(動) 위주다.』 (<중외의 국민성> 중에서)

 

많은 서양인들에게 린위탕은 중국과 서양을 비교하면서 특히 중국 문화의 특징을 입담 좋게 해설해주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가 펼친 중서(中西) 문화비교론의 핵심을 위의 인용에서 엿볼 수 있다.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측면도 없지는 않지만, 중국과 서양의 문화적 특징을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단순하게 대비시킨다는 비판도 받는다. 물질의 서양과 정신의 중국,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서양과 보수적이고 정적인 중국이라는 통념적인 이분법이 자리 잡게 하는 데 린위탕의 역할이 컸다는 비판적 지적도 있으며, 그러한 이분법에 대해 이른바 오리엔탈리즘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하나의 경지를 이룬 문필가? 현실에서 도피한 딜레탕트?

린위탕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재치, 위트, 유머, 풍류, 그리고 인생에 대한 여유로운 관조가 돋보이는 산문가이자 중국과 서양 문화의 가교 구실을 한 문명비평가. 중국의 복잡다난한 현실에서 사실상 도피하여 한가로운 글줄이나 희롱한 딜레탕트. 이러한 상반된 평가에는 모두 일리가 있다. 굴곡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국의 현실과 미래를 고민하며 치열하게 살았던 당시 중국의 많은 학자, 작가, 사상가들에 비하면 린위탕은 분명 한가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중국과 서양의 문화를 비교론적 시각에서 흥미롭게 논하고, 인생의 여유와 운치가 물씬 묻어나는 특유의 산문으로 하나의 경지를 이룬 문필가였다.

 

만년의 그는 타이완과 홍콩을 오가며 생활했지만 타이베이 교외 양음산 기슭에 세낸 정원이 딸린 저택에서 은거하기를 좋아했다. 1971년 큰딸이 자살한 뒤로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고 급격히 병약해졌다. 1974년 타이완 문화계가 열어 준 80세 생일 파티 이후 외부 생활을 사실상 마감하고 1976년 82세를 일기로 홍콩에서 세상을 떠나 양음산 기슭에 묻혔다.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유머와 인생>(임어당 지음, 김영수 편역, 아이필드)

유머에 관한 글과 함께 공자, 노자, 장자, 자사, 맹자, 도연명 등에 관한 일종의 비교문화론적 산문과 만날 수 있다. 말미에 실린 부록, 임어당의 문학 생애, 주요 저작 목록, 생애 및 작품 연보 등은 요긴하다. 이 가운데 ‘문학 생애’는 <임어당선집> 출간을 위해 완핑진(萬平近)이 1987년에 쓴 글로 중국 ‘대륙’의 시각, 즉 사회주의 문학론의 관점에서 린위탕에 접근하지만 지나치게 편파적이지는 않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린위탕의 문학적 의의를 평가하려 한다.

 

<쾌활한 천재>(린위탕 지음, 진영희 옮김, 지식산업사)

린위탕이 1947년 영문으로 출간한 소동파 전기 「The Gay Genius: The Life and Times of Su Tung Po)」의 번역서. 린위탕은 ‘소동파한테서 자신의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에’ 소동파에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소동파)는 삶이 짐스럽고 고해와 같다”는 말에 전혀 수긍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 자신은 그가 살고 있는 순간순간을 즐겼기 때문이다.

 

<베이징 이야기>(린위탕 지음, 김정희 옮김, 이산)

1960년에 초판이 나온「Imperial Peking: Seven Centuries of China」의 번역서. 린위탕의 개인사만으로 보면 베이징과의 인연이 그리 깊지 않지만, 베이징은 그에게 중국, 중국인, 중국 역사와 문화의 상징과도 같았다. 이 책에서도 린위탕의 필치는 자유롭지만 광범위한 사료에 바탕을 두어 ‘역사적 베이징’을 그려내는 데 충실한 편이다.

반응형